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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동 석실마을

석실마을은 돌이 많아 석실로 부르다 서원이 들어서면서 '서원-세원 (혹자는 세운)'으로 부르던 마을이다. 옛날 서원을 세운 김씨가 처음에는 적실로 하다가 적실(賊室)이 나라와 어긋남으로 석실로 고쳐 부르게 된 마을 이다. 마을 전체를 싸고도는 낮은 구릉지. 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한강.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마을이다.

왜정시대를 기준으로 100여 호가 거주하던 마을로 세가성씨로는 전주 이, 전주 김, 김해 김, 인동 장, 밀양 박, 백씨, 전씨가 살았으나 전주 이씨가 90여 호를 차지했던 전주 이씨 집성촌이다. 지금은 20여 호의 작은 마을로 남아 있다.

석실마을에는 고려 말 문신이자 서예가인 조말생의 묘와 신도비가 있으며, 그의 후손들의 묘역이 자리를 잡고 있다. 또한, 1624년(인조 2)에 반란을 일으켜 3일 천하를 호령하던 이괄(李适:1587-1624)의 묘역과 이괄의 묘석이 있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석실마을이 구체적으로 보이는 풍경은 3백년 전 겸재 정선이 '진경산수화' 에 몰두하여 그린 '경교명승첩'에 보이는 석실서원의 모습은 강폭이 좁고 물살이 센 곳을 지나면 호수처럼 넓게 펼쳐진 미호가 나타난다. 그 곳에서 겸재는 한 장의 그림을 남겼는데, 그 곳이 겸재의 스승 농암 김창협이 터를 잡아 살던 석실서원이다. 마치 한 장의 사진처럼 겸재가 그린 그림은 한강의 실제 모습 그대로 이다.

강가에 위치한 마을이지만 강어부는 없었고 천렵형식의 고기잡이는 성행하였다. 한강에서 주로 잡힌 물고기는 봄에 복사꽃 필 무렵부터 한 달간 '공지'가 주로 잡혔는데, 공지는 민물과 바닷물에 공히 사는 어류로 모래무지와는 4촌간이다. 공지와 눈치는 그물로 주로 잡았으며, 끄리와 피래미는 낚시로 잡았다.

석실마을에는 상인배가 강을 통한 물물교환이 있었는데, 주로 3명의 뱃사공이 봄에는 마포나루에서 소금과 젖깔류를 싣고 영월, 정선까지 거슬러 올라가 소금 1말에 콩 3-5말로 바꾸어 오는 상행위를 이 마을에서는 '바꿈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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