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공화국 / 남양주 지역을 살펴봅니다.





- 출처 : 국토지리정보원 국토정보플랫폼 -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제공하는 국토정보플랫홈의 항공사진을 살펴보다 특이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능내 강가 모래사장에 능내역과 연결되어 있는 철도의 모습입니다. 현재는 일부 구간은 철거되고 또 일부 구간은 팔당호에 위치하기 때문에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검색을 시작하였고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래 전 한강엔 여러 곳에 모래사장이 있었고 여름철 피서지로 많이 이용했다는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모래와 자갈 채취하여 골재로 판매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이야기는 좀 생소했습니다.


우선 흥미로운 모습의 지도와 그 흔적을 볼 수 있는 항공사진의 모습입니다. 팔당댐은 1974년에 완공 되었고 항공사진은 1년이 지난 1975년 모습이라 팔당호에 물이 채워져 모래와 자갈 채취를 위해 설치되었던 도로와 철도가 이미 물에 잠긴 모습으로 보입니다. # 옛 지도 # 75년 항공사진 그 모습이 궁금하여 검색하였지만 이미지는 찾을 수 없어 아쉽지만 관련 추억의 글들이 보입니다.



가장 눈에 띄는 능내역 부역장(조역), 역장으로 근무하신 분의 블로그에 글을 일부 소개합니다.




- AI 생성 이미지 -



“중앙선의 팔당역과 양수역 사이에 있는, 직원 8명이 갑반, 을반으로 나뉘어 하루에 4명씩 철야근무를 하는, 1일 여객, 화물열차 취급 약 90회, 착발하는 통근(완행)열차 상, 하행 9회, 강변에서 채취한 모래, 자갈의 차급화물 발송 10량, 소화물 수십 개 등 업무량이 타역에 비해 비교적 적은 역.”


출처 : 네이버 블로그 / 내 삶의 흔적들


능내역을 회상하는 글에서 “강변에서 채취한 모래, 자갈의 차급화물 발송 10량”이 그 시대 골재 채취의 활발한 모습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경기마을기록사업」 “마을지”에 기록된 능내 한강의 모습입니다.

출처 : 경기마을기록사업 3 / 남양주 능내 마재마을지 / 다산이 그리워한 마을, 마재 - 2013 -



“1960~70년대 마재마을은 100호가 넘는 마을이었다. 더구나 팔당댐 조성 이전, 자갈을 채취하려던 사람들이 몰려들어와 마을 남쪽 강가 율목동(밤벌)에 판자촌을 형성하며 살았던 시기에는 더 많았을 것이다.“



“- 자갈밭·자갈판 : 마재마을 백사장에는 모래와 함께 자갈이 있었다. 정규혁 씨는‘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으면 여울에 자갈 굴러가는 자글자글 소리가 들려왔다.’고 기억한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여름밤 백사장 자갈밭에 누워 더위를 피했던 기억을 가지고있었다. 당시 모기가 하나도 없어 좋았더라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모이다보니 자갈밭이 동네사랑방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팔당댐이 생겨 수몰되기 전까지는 자갈밭에서 자갈을 채취하는 것이 마재마을의 주요 생업이었다. 그로 인해 외지에서도 자갈채취를 위해 마을에 찾아와 밤벌, 다락골 등지에 새로운 거주지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여름 장마 때 상류에서 모래와 자갈이 내려와 쌓인다고 해서, 자갈밭을 ‘돈광’으로 부를 정도였다.“



모래와 자갈 채취를 목적으로 군 부대가 있었다니 그 모습이 더 궁금하네요.



“- 119부대 : 현재 마을 서남쪽에 있는 연밭에 있던 공병부대로, 마재마을에 흔한 자갈과 모래로 벽돌을 만들어 전방 부대로 보내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



“마을지”의 골재채취 부분은 그 시대를 자세하게 묘사하여 더욱 실감나게 합니다.



2) 골재채취



건설공사에서 쓰이는 자갈이나 모래 따위의 재료인 골재를 선별, 파쇄, 세척하는 작업을 통틀어 골재채취라고 한다. 마재마을에서도 한강변의 넓은 자갈밭과 모래사장을이용해 골재채취가 이루어졌다. 1966년 경 마을에 들어와 있었던 119대대 또한 공병부대로 마을의 골재들을 이용해 벽돌을 만들어 군사시설이나 민간의 건축물을 만들 때 공급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댐 건설로 골재채취가 불가능해지자 철수하였다.

14살 때부터 골재채취 일을 도왔던 조영진 씨에 의하면 마재마을에서 골재채취가 시작된 것은 일제시대 때부터 라고 한다. ‘동아건설’이라는 회사가 마을에 들어와 골재채취를 시작했는데 이때 마재고개를 넘어가는 도로를 트럭과 같은 큰 차들이 다닐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후 골재채취가 활발해지자 철로를 자갈밭 근처까지 끌어와 기차를 이용해서 골재들을 실어 날랐다. 골재채취를 하면서 자갈밭을 ‘돈광’이라고 불렀는데 일년 내 골재들을 캐내어도 장마철만 지나고 나면 자갈이 다시 쌓였기 때문이다.

골재채취는 골재를 분류하는 일, 분류된 골재를 트럭에 상차하는 일, 기차에 더 많은 골재를 실을 수 있도록 골재를 다지는 일로 나뉜다. 골재를 싣거나 다지는 것 같이 힘이드는 일이 많아 골재채취는 주로 남성이 하였지만 자갈밭 표면에 있는 겉자갈을 캐고분류하는 작업은 여자들도 하였다.



골재를 분류하는 일은 자갈과 모래를 분류하고 다시 자갈을 크기별로 분류하는 일을말한다. 자갈은 자갈밭 표면에서 얻을 수 있는 겉자갈과 삽을 이용해 파내야 하는 속자갈로 나뉘고 크기별로는 4부, 6부, 8부 등으로 나누었다. 자갈을 고를 때 겉자갈은 손으로 고를 수 있었지만 속자갈은 삽을 이용해 파낸 뒤 세울 수 있는 큰 체를 가지고 분류하였다. 체를 구멍 크기가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 순서로 3~4개를 비스듬히 일정한간격으로 두고 삽으로 자갈을 퍼서 체들이 세워져있는 곳에 던지면 크기별로 분류가 되어 맨 뒤에는 모래만 남았다. 분류한 골재들은 크기별로 쌓아두면 상차하는 사람들이트럭에 실어 기차가 있는 곳까지 옮겼다.



골재를 제무시트럭(GMC트럭)에 상차하는 사람들은 조를 이루어 정해진 사람들만이할 수 있었다. 4명이 한 조를 이루었으며 마을에는 여섯 개의 조가 있었다. 트럭 한 대당 두 조가 교대로 일을 했는데 한 조가 여섯 차를 실으면 다음조로 교대되었다. 한 개의 조를 ‘한 구미’라고 불렀다. 한 차를 실을 때 걸리는 시간은 모래의 경우 7~8분 정도가 걸렸고 자갈의 경우 15분 정도가 걸렸다. 모래는 가볍기도 하고 백사장에 트럭을 밀어 넣은 후 삽으로 쓸어 담듯 실었기 때문에 금방 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갈은 무겁고 자갈 사이로 삽을 집어넣는 것도 어려워 상차하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힘도 더 많이들었다. 또한 흙을 파는 것 보다 삽이 금방 닳아 자주 새것으로 바꿔야 했다. 상차하면서 정확한 벌이는 기억나지 않지만 자갈을 선별하는 사람보다는 벌이가 좋았다.

골재를 다지는 일은 2명이 함께 하였다. 트럭에 골재가 실려 오면 기차 철로 근처에트럭을 이용해 기차에 부을 수 있을 만큼 흙을 쌓아 만든 언덕 위로 트럭이 올라간다. 언덕 위로 트럭이 올라가 골재를 쏟으면 중간에 설치된 체를 거쳐 한 번 더 모래와 자갈이 분리되어 기차와 언덕 사이에는 모래가, 기차 안으로는 자갈이 실리게 된다. 기차 화물칸에 한 개 이상의 트럭이 골재를 붓기 때문에 더 많은 자갈을 싣기 위해서 두 사람이들어가서 자갈을 평평하게 정리하였다.



골재채취에 대해 급여는 매일매일 일한 양을 확인받아 ‘만보’라고 불리던 전표를 받아두었다가 한 달에 한번 정도 ‘자갈사장’이라고 불리는 급여관리인에게 가서 돈으로 바꾸었다. 골재를 분류하는 사람은 자신이 분류한 양만큼 돈을 받았고 상차하는 사람은 조별로 상차한 트럭의 수로 돈을 받아 4명이 나누어 가졌다. 골재를 다지는 사람도 다진 화물칸 수에 따라 돈을 지급받아 2명이 나누어 가졌다.

한여름에는 햇빛에 자갈도 달궈지고 트럭도 달구어져 열기 때문에 일하기가 힘들었고 겨울는 얼어붙은 자갈을 곡괭이로 쪼아서 실어 담아야했다. 모든 일이 야외에서 이루어지는데다 힘이 많이 드는일이었기 때문에 골재채취를 하는 사람들이 모여 몸보신을 위해 개고기를 자주 먹었다. 남자들끼리 모여서 해먹는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지금의 보신탕처럼 양념을 넣고 끓여 먹는 것이 아니라 수육처럼고기를 삶아서 된장에 찍어 먹었다. 여름에는 자갈밭에 솥을 걸어 해 먹었고 겨울에는일하는 사람 중 한 사람 집에 모여 먹었다골재채취는 팔당댐의 건설로 백사장과 자갈밭이 사라지고 회사가 철수하면서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댐으로 자갈밭이 사라지자 땅이 많은 사람들은 보상을 받아 이사를 가기도 했지만 골재채취를 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생계수단을잃을 수밖에 없었다.



골재채취가 한창일 때는 이 일을 하려고 마을로 이주해 오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골재채취를 위해 들어온 사람들은 주로 다락골과 지금의 오수처리장 앞쪽인 율목동에모여 살았다. 일을 위해 이주해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정식으로 집을 짓지 않고 판자를이어 만든 집에서 살았다. 골재채취를 할 수 없게 된 후에 다락골에 살던 사람들은 능내와 새말 쪽으로 보조금을 받아 이주했다.



주민 개개인의 추억을 기록한 부분에서 자갈채취를 보여주면 부분도 있습니다. 그 중 두분의 추억을 살펴봅니다.



4. 이제 고생만 남은 것 같아 쓸쓸한 박OO 씨



저기 저 능내 넘어가면 요렇게 길 있는 게 그게 철로였어. 여기까지 자갈 때문에 들어온 거야 기차가. 하여튼 여기까지 들어와서 싣고 나가고. 그게 들어 오믄 거기다 실어놓으면 또 끌어 나가구. 또 인저 실어다 노면 끌어 나가구. 여기 사람들은 그렇게 돈 벌었어요. 그래서 타동 사람들두 많았어요. 그래서 여기 인총이 많았어. 그때 하루 나가면 300원, 하여튼 나는 나가면 300원밖에 못 벌었어요. 더 버는 사람은 더 버는데, 하루 한 차 하는 사람은 350원도 벌구, 한 차에 아마 350원이었나봐. (그럼, 그때 쌀 한가마니가 얼마였을까요?) 쌀값을 모르지 우리는 쌀을 안 사먹었으니까. 농사져 먹구. 아저씨는 기차 화통 실어다 놓으면 거기서 삽으로 떠서 올려서 그 기차에 싣구 그랬지. 또 추럭 갖다, 우리네가 이렇게 자갈 해노믄 그 앞에 갖다 또 자동차에 실어줘. 그러면 또기차 화통 옆에 또 갖다 부려. 거기서 또 싣고 가기도 하고, 그때 그랬어요.

둘이서 벌면 꽤 벌었지요. 그런데 나 처음 할 적에는 신랑이 징용 가서 없을 때 한 거구, 또 영감 들어와서는 내가 뒷바라지 하느라구, 애들 길르구 밥을 해다 줘야 허구 그러니까 나 자갈을 못 했지. 일할 때 꼭 밥을 여다 줘야 해요. 삼시 세 때를. 기차 화통들어오면 나가서 실어줘야 하니까. 그러지 또 농사 지니깐 그런 것 해야지. 애들 여럿길르구 그러니까 뭐 그렇게 같이는 못했어요. 그래두 자갈해서 송아지두 하나 샀었는데, 나 자갈해서 송아지두 샀었어요. 송아지를사서 길러가꾸 논도 두마지기 샀었는데, 그걸 해서. 그니깐 두마지기 세마지기 사면 야중에는 저절로 인제 자꾸 사져. 많이.



6. 홀로 시작하여 대가족을 일군 조OO 씨



농사만 지은 게 아니고. 전엔 여기가 다 지금 강물 있지? 그게 댐을 막아서 강이 커졌지. 그전에 쪼금 흘러내리고 전부 자갈밭이었어요. 그게 자갈밭이어서 순전 그 자갈 캐서 먹고 사는 사람이 많았었지. 기차 레일을 깔고서 기차 방통이 와가지고 제무시로 실어날랐어. 자갈들을 캐서 채로 쳐서 쌓아놓으면 그걸 제무시가 (와서 가져갔지). 지금은다 기계로 하지만 그전엔 다 인력으로 했지. 그게 삽으로 오삽으로 퍼올려 실어가지고제무시에 실어서 기차 방통에 갖다 붓고 매일 열 개, 열다섯 개 실어 날랐다고. 서울 인천으로 자갈이 여기서 나간거지. 모래, 자갈이. 아파트 짓고 집짓고 뭐 다 여기서 나가서 한 거야.

철도 자갈 다 여기서 나간거야. 엄청났지. 그때는 자갈판에 와서 벌어먹고 하려는 사람들이 그 밖으로 수천 명이 있었지. 사람이. 집이 꽉 찼었어. 지금 강 있는데 그리로.(다락골) 그쪽 거기 다 집이 꽉 찼어. 집들이 여기까지 강가에 (있었어). 댐이 막히고 그러는 바람에 다 떠났지. 예전부터 다락골이라고 했는데. 마을은 없었는데 자갈판 생기는 바람에 마을들이 구성이 된 거지. 자갈 캐먹고 그러려니까. 많이 캐면 많이 주고 조금 캐면 조금 주고. 상차 싣는 것도 많이 실으면 많이 주고 조금 실으면 조금 주고 그러는 거지. 몇 유메 당인거지. 마냥 킬로나 마찬가지지.

아우.가격은 지금 잊어버렸지. 유메당 1유메, 2유메, 3유메 이렇게 해가지고, 제무시 한 차당 4유메 돼. 한차 실으면 얼마, 모래 한 차 실으면 얼마, 품값이 정해져있었지. 혼자하는 게 아니고 나는 상차를 했지. 남이 자갈들을 캐서 모 아놓으면 그걸 실어서 제무시실어서 화차에 붓는 걸 그걸 했는데 보통 한차에 네 사람씩 구미가 짜가지고 싣는 거야. 한차 싣는데 얼마씩 그걸 가지고 넷이 노나 먹는 거지. 캐는 건 안 하고 캐놓으면 실어서 붓는 거. 넷이 노나 먹 는 거지.

허리고 뭐고 지금은상상도 못하지. 여름에 삼복더위에 자갈이 달아가지고 맨발로 딛지도 못해. 그럼 제무시 죄다 달아가지고 펄펄 끓는 거야. 거기서서 그걸 삼복더위에 퍼서 실었어. 아이구 땀이 뭐야. 지금 사람은 생각도 못하는 거야. 그건 상상도 못하는데. 개 많이 잡아먹었지. 거기다가 힘들면 쉬는 날이 있고. 그전에 죄 땀을 흘리면 물에 들어가서 또 있다가 나와서 또 하고 그랬지. 강가니까.

밥도 지금은 요만큼씩 먹지만 그전엔 이만큼씩 먹어. 그전엔. 그럼 보리고 쌀이고 조고 밥주발이 이만큼씩 했는데. 그전에 나 자갈상차 올릴 제는 이만한 주발에다가 주발밑에 있는 거만큼 또 올라왔어. 그래도 그게 모자라, 그래도. 또 먹을 게 있어? 밥만 바라고 있는 건데. 뭐 지금은 밥을 먹어? 지금은 한 끼도 먹고 두 끼도 먹고. 지금 사람은 상상도 못하는 거야.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을 지내온 거지. 저 댐 막는 바람에 없어진 거야. 거기가 돈광이었어. 거기 돈광, 한해 그냥 죄 파먹고나면 여름에 장마지고설랑 또 그만큼 갖다 쌓아놓고, 다 먹고 나면 장마 지면 또 갖다쌓아 놓고. 그렇게. 물살에 돌이 떠내려 와서 이렇게 구부려졌잖아? 와서 거기서 밀리는 거야.

아쉽지. 땅들 많은 사람들은 있는 사람들은 저 보상 받아가지고 딴 아쉽지. 땅들 많은 사람들은 있는 사람들은 저 보상 받아가지고 딴 데 가서 인제 사고 뭐 이러고 다른 것도 하고 이랬는데 땅 없는 사람은 그냥 보상하나 뭣도 없이 그냥자빠진 거지. 그냥 없어진 거야. 사람들은 다 뿔뿔이 그냥 해진거지 인제. 나간 사람도 있고. 그냥 눌러 앉아서 그냥다른 거해서 먹고 사는 사람도 있고. 다 이렇게 각자 그냥. (공사) 그럼. 나는 거기서 그냥 내가 배운 게 있어 뭐가 있어? 노동해서 먹고 살지. 농사 남의 땅 얻어가지고. 농사지어서 먹고 살고.

하하하 (고생) 말도 못하지. 지금 사람은 꿈에도 못 꾸는 거야. 못 꾸는 거야. 그 삼복더위에 무지하게 더울 적에 자갈판에 가면 자갈이 달아가지고 맨발로 딛지도 못해. 그럼 제무시에 갖다 대면 쇳덩이가 달아가지고 이게 펄펄펄펄 끓는 거야. 거기서 그걸 퍼서 자갈을 실은 거야. 하하하하 찜통이지 찜통. 그 뭐 땀이 그냥 가만있어도 줄줄줄줄쏟아지지 뭐. 겨울에도 했지. 겨울에는 꽁꽁 얼어붙은 걸 또 가서 곡괭이로 쪼아가지고그걸 퍼 실어서. 아이 참. 지금은 생각도 못할 일이야.

(허리) 엄청 아프지. 삽이 안 들어가지. 여기가 그전에는 여기가 대고 (허벅지로) 밀어버렸어 이렇게. 이렇게 나가면....지금도 여기가 굵잖아. 이거보다는 그래 지금도 굵어 여기다 하도 대고 밀어서 그런 거야. 이게. 나는 상차해서. 그전엔 벌이가 지금으로 보면 괜찮았지. 댐이 막혀 가지고 유원지가된 거야. 배를 가지고 뱃놀이를 서울 사람들이 와서 벌어먹고 살다가 그게 규제가 되지. 상수도가 생기니까. 그래가지고 그냥 (마을사람들) 다들 헤어졌지.(젊었을 땐) 자갈판에서 살다가 배가지고 하다가 그게 없어져서 농사짓고 사는 거지. 그전에도 조금씩은 지었지. 농사 많이 하는 것은 다 끝난 다음에 한 거지. 맨날 노동이지. 뭐.







이 페이지는 2026년 7월 27일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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